본문 바로가기
유럽여행이야기

이탈리아 안의 작은 국가 산 마리노, 역사, 국민, 자연환경, 가볼 만한 여행지

by 이메스 2023. 2. 17.

산 마리노

울릉도 보다 작은 이탈리아 안의 작은 국가 산 마리노에 대해서 알아보자.

산 마리노 역사, 국민, 자연환경, 가볼 만한 여행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산 마리노

유럽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 한 산 마리노는 인구수 33,740명(2021 추계) 정식 명칭 산 마리노 공화국이다.

온대성 기후에 이탈리아인과 산 마리노인, 이탈리아어를 사용한다. 중앙집권공화제/다당제 & 단원제로 로마 가톨릭 화폐는 유로이다. 아드리아 해에서 가까운 티타노 산기슭에 있는 이곳은 4면이 이탈리아에 둘러싸여 있다. 이 나라는 유럽에서 바티칸시티와 모나코 다음으로 작은 독립국가이며, 나우루의 독립(1968년)이 있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화국이었다.

산 마리노 역사

산마리노의 기원은 4세기 초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성 마리누스와 그리스도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12세기에 이르러 산마리노는 자체의 법령과 콘술(집정관)에 의해 통치되는 자치체로 발달했다.

이 자치제는 고립된 위치와 산의 요새 덕분에 이웃한 주교와 영주들의 침범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근처 해항인 리미니를 지배하던 말레테스타 가문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우르비노를 지배하던 그 가문의 경쟁자 몬테펠트로 가문의 보호를 받았다.

15세기 중엽에는 가문들의 집회인 아렌고에서 뽑힌 60명으로 구성된 대의회가 통치하는 공화국이었다. 16세기 체사레 보르자에 의한 점령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의 격렬한 공격을 막아냄으로써 르네상스 시대가 지난 후에도 이탈리아 자치 도시국가의 한 유물로 존속할 수 있었다. 18세기에는 과두정치와 교황령에 합병시키려는 시도로 인해 한동안 국력이 쇠퇴했다.

나폴레옹은 1797년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이 공화국의 독립을 존중했으며, 영토를 넓혀주겠다는 제의까지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에 열린 빈 회의(1815년) 역시 이 나라의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했다. 19세기의 이탈리아가 민족국가가 된 후 일련의 조약들을 통해 독립을 승인받았다.

산마리노 국민

선사시대와 로마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티타노 산과 산기슭에 촌락이 생긴 분명히 알려진 때는 성 마리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도착한 이후이다. 이곳 인구의 상당수가 본토 주민이 아닌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다수가 이탈리아인이다. 2만 명 이상의 산마리노 국민이 이탈리아. 미국. 프랑스. 아르헨티나 등 해외에 거주한다.

주민의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공식 언어는 이탈리아어이고 널리 사용되는 방언은 피에몬테, 롬바르디아 방언과 유사한 켈트어이다.

산마리노 자연환경

영토는 북동쪽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최장 길이가 13km인 불규칙한 직사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아드리아 해로 흘러드는 마라노 아우사 천과 마레키아 강으로 흘러드는 산마리노 천이 이 나라를 가로지른다. 자연경관은 거대한 석회암 덩어리인 티타노 산(739m)이 중심을 이루는데 남서쪽에는 이 산으로부터 구릉들이 펼쳐져 있는 반면, 북동쪽 지역은 로마나 평야와 아드리아 해를 향해 경사가 완만하게 져 있다. 3개의 정상에 고대의 삼중 요새가 서 있는 티타노 산의 윤곽은 수 km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다. 기후는 온대성으로 여름최고기온이 26c, 겨울 최저기온 -7c이다. 연강우량은 560~813mm이다. 식생은 고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지중해 연안지역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올리브 나무, 소나무, 참나무, 서양물푸레나무, 포플러, 전나무 등과 많은 종류의 풀, 꽃들이 자란다. 또 이곳이 원산지인 조류와 철새들이 많이 살고 있다.

가볼 만한 여행지

*산마리노 역사지구와 티타노산

이탈리아 반도 내부의 독립국가인 산마리노의 역사 유적지이다. 티타노 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산마리노 역사지구와 티타노 산이라 불린다. 요새, 성탑, 성벽, 교회, 수도원 등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건축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을 뿐 아니라 역사지구 전체가 중세 도시국가의 발달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2008년 유네스코에 의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적들이 밀집한 55만 m의 중앙지역은 핵심구역으로, 이를 둘러싼 167만 m의 주변지역은 완충구역으로 지정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티타노 산 정상에 형성된 산마리노 유적지는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발달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전쟁과 약탈이 빈번하던 중세 초기에는 도시가 발달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장기간의 무정부 상태로 로마 제국의 옛 도시들 까지 빠르게 폐허로 변해갔다. 그러나 6세기 이후 민족대이동이 마무리되고 정착한 세력을 중심으로 지배질서가 새로 에워지면서 혼란한 정국은 안정을 되찾아 갔다. 9~10세기 바이킹의 침입으로 유럽은 다시 혼란에 빠지는 듯했으나 봉건제도에 기반 한 농업의 발달은 계속되었다. 바이킹들의 침력을 막아내는 데 성공한 10세기 후반에는 상공업이 번성하고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도시의 활기로 이어졌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여러 상업 도시들이 발달하였는데. 이는 이탈리아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서유럽을 비잔틴과 레반트 지방과 잇는 가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산마리노의 공화국의 창시자인 성 마리누스

12~13세기에는 자치권을 획득하여 영주의 감독으로부터 벗어나는 도시들이 생겨났다. 자유를 얻은 도시민들은 의회를 만들어 시의 운영하였는데 일부 사람들은 이를 로마 공화정의 부활로 여기기도 했다. 북이탈리아 동부에 위치한 산마리노도 그러한 중세자치도시국가들 가운데 하나였다. 13세기 중반 공화정체제를 수립한 산마리노는 시대에 따라 부침을 겪기도 하였으나 오늘날까지도 그 정치체제를 유지하며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지켜나가고 있다. 현재의 국경선도 1463년 확정된 것 그대로이다.

중세 도시의 핵심은 성벽과 성당. 의회건물. 시장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 산마리노 역사지구의 유적들을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우선 도시 방어를 위한 군사 건축물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13세기 세워진 세 개의 탑이다. 티타노 산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8 각형 모양의 제1 탑 로카(Rocca)는 톱니 모양 상단을 가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해발고도 756m에 달하는 산 정상에 세워진 제2 탑 체스타(Cesta)는 14세기 프라타 성벽을 매개로 도시 내부와 연결되어 있다. 절벽 위에 있는 제3 탑 몬탈레(Montale)는 16세기 이후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18~19세기 들어 복구된 것이다.

산 프란체스코 성문과 리파 성문은 각각 14세기, 15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둘 다 사암을 재료로 하여 아치 형태로 만들어졌다. 마치 고대 그리스 로마 신전과 같은 모습의 산마리노 성당은 옛 교회 자리에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다시 지어진 건축물이다. 역사지구 북서쪽 모퉁이에 있는 성 키아라 수녀원은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건축물로 현재는 이민 박물관의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교회는 14세기 중반 세워진 역사지구 내 가장 오래된 종교건축물로, 안토니오 알베르티의 15세기 그림이 있다. 끝으로 역사지구 내에는 이곳이 오랜 기간 공화국의 정치와 상업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공공건축물도 남아있다.

 

감사합니다.

댓글